장정이라는 용어에 종지부를 직은 것은 중국공산당의 최고지도자 모택동이었다. 1935년 10월 중앙홍군의 주력부대가 산시성의 북부를 가리키는 섬북연안을 포함하는 지명에 도착할 때 까지 과정을 모택동은 “루이진으로부터 12개월 2일, 총 367일, 전투는 35일, 휴식은 65일, 행군은 약 267일 이었다. 야간 행군까지 계산하면 다르다, 우린 장시성 후전성, 광동성, 후난성, 구이저우성, 광시성, 현재의 광시장족지구 운난성 쓰촨성 옛 사캉성 간쑤성, 산시성 등 11개의 성을 지나왔으며, 1군단의 통계에 따르면 가장 많은 2,5000리를 걸었다. 이는 확실한 원정이자 명실상부하고 전례 없는 정정이다”라고 선언했다. 이때부터 말을 줄이어 ‘장정’이라는 용어가 공식용어로 쓰이었다. 모택동은 이어 12월 중국공산당활동분자회의에 보고된 「일본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전략을 논함」이라는 글에서도 장정을 언급 했다. 중앙홍군외의 다른 홍군부대의 이동 거리를 합하면 40.000리였다. 따라서 전체홍군의 이동거리는 65,000리의 대 장정이 되는 것이다. 대장정에는 다수조선족장군의 활약상을 짚으려함이다.
처음에는 정정이라는 용어자체가 쓰이지 않았다. 중앙홍군의 초기 작전 목표는 후난성과 후베이성 일대에서 홍군2군단 및 6군단과 합류해 국민당군의 포위토벌에 대한 반격을 실시해 장시성을 중심으로 한 중앙소비에트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초기부터 1935년 5월까지는 ‘장거리 전투’, ‘원정’, ‘전략적 이전’, ‘서정’, 돌파라는 말들이 주로 쓰였다. 그러다가 1935년 7월 홍군 총사령 주덕이름으로 쓰촨성 면녕에서 발표된 「중국농공홍군 포고」에서 처음으로 “홍군의 만리장성”이라는 표현이 등장 했다. 이어 주덕은 면년현혁명위원회 성립대회의 연성에서도 장정을 다시 언급했다. 그러면서 장정이라는 말이 중국공산당과 홍군사이에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1933년 9월부터 국민당군의 다섯 번째 ‘포위토벌’ 공격으로 중앙소비에트는 큰 위기를 맞았다. 이에 중국공산당과 홍군은 1934년 10월 상순에 중앙근거지가 있던 장시성 루진에서 철수해 상대적으로 안전이 보장된 서쪽 지역으로 이동할 것을 결정했다. 제1병면군으로 불리던 중앙홍군의 병력은 8〜9만 명이었고, 이밖에 간부를 포함하여 수송대원까지 10만 명이 넘었다.
중앙소비에트의 홍군은 장개석의 국민당이 1930년 11월부터 1931년 9월까지 세 차례에 걸쳐 가한 ‘포위토벌’공격을 물리치는데 성공했다. 중국공산당은 1981년 10월15일 장시성 루진에서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임시정부수립을 선언하고 68명의 중앙집행위원 주석 모택동을 선출했다. 1933년 1월 에는 중국공산당 임시중앙 위원회가 상하이에서 중앙소비에트 지구로 이동했다. 이후 국민당군의 네 번째 ‘포위토벌’ 공격도 주은래와 주덕의 지휘아래 물리쳤다.
1929년 1월, 모택동과 주덕이 이끄는 홍군 제4군 주력부대가 장시성 방향으로 남진을 시작했다. 그해 4월 장시성 남부에서 혁명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첫 농공 병 정권 곧 소비에트가 출범했다. 이후 소비에트는 장시성과 인접한 복건성, 광동성으로 확대었다. 이 세 개의 성에 설치된 소비에트를 모두 어우르는 것이 중앙소비에트 또는 중앙혁명근거지였다. 1931년 1월 15일 주은례가 중잉소비에트 중잉국 서기로 선임되었는데 주은례의 현지도착 이전에는 모택동이 대리를 맡았었다.
중국 공산당에서는 1차 국공합작이 와해된 이후인 1927년부터 1937년 까지 중국 공산당의 주도아래 벌어진, 장계석의 ‘반동통치’ 에 대한 투쟁, 봉건적 토지제도 철폐와 공농(노농) 민주정부수립을 병행하려던 투쟁을 제2차 국내혁명전쟁 또는 토지혁명전쟁이라고 부른다. 토지혁명전쟁시기에 중국공산당은 노동자와 농민을 기반으로 한 군대를 꾸리는 일에 착수하였다. 1927년 호북성 지금은 홍안에서 첫 번째 홍군이 출범한 이후 중국 각지에서 홍군이 꾸려졌다. 1928년 5월 25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전국 가지의 공농혁명군을 홍군으로 부를 것을 결성했고 /1930년에는 중국농공홍군 이를 ‘홍군’/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