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단고기』 역사서가 나온지 어언 10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고 대중서가 된지도 이미 40여년 이란시간이 지나갔다. 그럼에도 과거의 중화주의 사관에 의해 쓰인 사서의 망령에 의해 일제식민주의 사관의 굴레를 벗지 못한 강단의 사학자들은 유치한 궤변을 늘어놓으며 우리역사 일만년의 『환단고기』」가 위서라는 주장을 끊임없이 되풀이하고 있다. 

 『환단고기』는 계연수가 이전부터 전하여 오던 5종류의 책을 합편한 것이다. 이 책은 우리민족의 찬란했던 상고역사를 밝혀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민족의 종교와 철학 문화까지도 밝혀주고 있으며 더 나아가 인류의 시원역사와 원형문화까지도 밝혀주고 있는 지보지서至寶之書이다.  

 계연수는 안함로가 지은 「삼성기」, 원동중이 지은 「삼성기」, 이암이 지은 「단군세기」, 범장이 지은 「북부여기」, 그리고 이맥이 지은 「태백일사」 의 5권의 책을 합본하여 「환단고기」를 편찬하였다. 여기에 언급된 다섯 명의 인물들은 모두 역사에 실존했던 사람들이다. 안함노(서기579〜640)는 신라 진평왕 때의 도승으로 각훈이 지은 해동고승전에 그의 생애가 기록되어 있으며 신라 십성十聖의 한분으로 받들어지는 분이다. 고려 때의 인물로 비정 되는 원동중의 자세한 행적은 전해지지 않지만, 『세조실록』 <3년 (서기1457)조>에 8도 관찰사에게 유시한, 책을 수집하여 올리라는 수거령 속에 안함노 安含老元董仲三聖記라는 말이 나오므로 이 두 사람이 지은 「삼성기」가 조선시대 초기에 세상에 전해져 왔다는 것을 확증할 수가 있다. 이암 (서기 1297〜1364)은 고려말의 명신으로 『고려사』 「열전」 24에 전기가 실려 있다. 「단군세기」에는 그가 강화도의 해운당에서 서문과 「단군세기」를 썼다고 두 군데에서 언급하였는데, 목은 이색이 쓴 묘지명에서도  “선원사의 식명노인과 속세를 떠난 벗으로 삼고 절 안에 집을 지어 해운이라 현판을 걸었다”라고 하여 그가 말년에 강화도 해운당에 머물렀음이 확인되고 있다. 

 범장은 1369년 과거에 급제한 후 고려가 망하자, 만수산에 은거했던 두문동72현 중의 한사람이고, 이맥(1455〜1528)은 조선 중종 때 인물로 1498년 과거에 급제한 후 1504년 연산군의 총애를 받는 장숙용이 사가의 집을 크게 짓는 것을 간하다가 괴산에 유폐되었다가 중종반정 이후 유배에서 물러난 후 1519년부터 춘추관의 편수관으로 있다가 1528년에 74세로 졸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가 쓴 「태백일사」의 발문을 보면 정사에 기록되어 있는 그의 삶과 완전히 일치하고 있으며 그가 「태백일사」를 쓰는 과정까지도 소상하게 밝혀주고 있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 우리는 5권의 책이 역사적인 근거가 있으며 내력이 분명한 실존 인물에 의해 쓰여진 믿을 만한 책이라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위의 책 중에서 「북부여기」 의 저자 범장에 대해서 좀 더 상세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북부여기는 고려시대 말기의 실존 인물인 범장의 저술로 금성錦城나주 범 씨이다. 춘추시대 진晉의사회가 공을 세워 땅을 식읍으로 하사받은 것에서 유래한다. 증조부 범승조는 낭야 사람이다. 『금성범씨대동세보』에 따르면 중국에서 예부사랑을 지냈고 충선왕비계국대장공주(?1315)를 따라 고려에 들어왔다. 범승조는 고려에올 때 성리학 서적을 가져와 널리 보급했다고 한다. 그의 아들 범유수는 문하사랑 평장사를 지냈고 1334년 여진족 토벌에 공을 세워 일등공신에 책록되고 금성군에 봉해져 금성범씨 가문을 일으켰다. 그의 아들 복재 범후춘은 안향의 문인이다. 범후춘의 아들이 범장이고 호는 복애 이다. 생졸년은 불명이고 불훤재 신현(1928〜1377)의 문인이다. 공민왕 기유년(1369)에 문과에 합격했다. 관직은 덕녕부윤과 간의대부를 지냈고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들어가 두문동 72현 중한분이 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