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부여(여씨부여)
북 부여는 단군조선에서 고구려를 이어주는 나라로 북부여가 국호이다. 광개토태왕비문에 “시조 추모왕이 북부여에서 나왔다”라고 하였고 모두루묘지명에서 “추모왕은 원래 북부여에서 나왔다”라고 하였으며 『삼국유사』 북부여조에서도 “도읍을 세워 왕이라 일컫고 국호를 북부여라 했다” 그런데 한국의 강단 사학계는 북부여를 국호로 인정하지 않고 부여의 북쪽을 가리킨다고 인식하고 있다. 단군조선의 제3왕조인 대부여 요령성개원시의 북쪽에 있어 북부여라 한 것이다. 북부여의 건국자는 해모수이다. 해는 태양을 뜻하고 광명을 상징한다. 이를 성으로 삼아 해모수가 북부여를 건국한 해는 BCE 239년이다.
그런데 『삼국유사』 에서는 3갑자를 내려 전한의 선제 신작3년 BCE 59년 이라고 기록하여 북부여의 역사를 미궁에 빠뜨렸다.
북부여의 역년은 첫째 BCE 239년 건국에서 해보수의 혈통이 지속된 해부루가 동부여로 옮겨가는 BCE 86년까지 154년으로 볼 수 있고, 둘째 고두막한의 동명부여 즉 졸본부여를 후기 북부여라 하여 이를 포함하면 고주몽이 북부여의 7대 단군으로 등극하는 BCE 58년까지 182년으로 볼 수 있으며, 셋째 고주몽이 고구려라는 국호를 쓰기 시작하는 BCE 37년까지 연장하면 203년이 된다.
○후기북부여 (동명부여, 졸본부여)
흉노를 격파한 한무제는 BCE 108년 위만 왕조를 멸망시키고 같은 해 여세를 몰아 요동을 넘어 북부여를 침략하였다. 당시 북부여의 4세 단군 고우루는 이를 효과적으로 막아내지 못하였다. 이때 구국의 영웅인 고두막한이 의병을 일으켜 단군이라 칭하고 한나라군대를 물리치고 BCE 108년 졸본에서 즉위하였다. 자신의 이름이 동명이어서 나라이름을 동명국 또는 동명부여라 하였으며 졸본에 도읍을 하여 졸본부여라고도 불렀다.
고두막한은 세력이 강해지자 BCE 86년 4세단군 고우루를 이어 왕이 된 해부루를 제후로 강등시켜 가섭원으로 추방하였으며 이후 북부여라는 국호를 계승하였다. 그리 하여 고두막한의 부여를 후기북부여라고 부른다. 현 한국사학계에서는 동명왕 고두막한을 알지 못하고 동명왕을 으레 고주몽으로 인식하고 있다. 1922년 낙양 북쪽에서 발견된 연남산의 묘지명에 “옛 동명제께서 기운에 감응되어 사천을 넘어 나라를 여시고 주몽께서 태양기운으로 임신되어 패수 가에 도읍을 열었다”라고 하여 동명제와 주몽이 다른 사람이고 동명제가 주몽보다 앞선 사람으로 기술되어 있다. 연산군 때의 문신인 김천령은 시부에서 “동명왕이 왕업을 개창하시고 주몽이 그 여파를 계승했다”고 하여 동명왕과 주몽이 다른 사람이라고 하였다. 동명부여 즉 졸본부여의 역년은 BCE 108년에서 BCE 58년까지 51년이고 후기 북부여의 역년은 BCE 58년 까지 29년이 된다.
○ 동명부여(가섭원부여, 하부여)
『삼국유사』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북부여 왕 해부루의 재상 아란불의 꿈에 천제가 내려와 이렇게 말하였다. “장차 내 자손에게 이곡에 나라를 세우도록 할 것이니, 너는 다른 데로 피해가라. 장차 동명왕이 일어날 조짐을 말한 것이다. 등 해가에 가섭원이라는 곳이 있는데, 땅이 기름져 왕도로 삼기에 적당하다” 아란불은 왕에게 권고하여 그 곳으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동부여라 하였다】
동부여는 BCE 86년 고두막한에 쫓겨 해부루 BCE87〜CE22를 거쳐 108년간 지속되다가 고구려의 3대왕 대무신 열제에 의해 망하게 된다.
-자료 대한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