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가는 대로)밥상머리 예절
작성일: 2023-08-10
밥상머리예절이나 식탁예절은 같은 말이다. 예전 대가족제도에선 한 지붕 三代가 어울려 살던 시기의 우리식식문화이다. 그땐 농사를 인력에만 의지해 나름 일손이 달리어 조석 간 밥상머리가 얼굴을 마주하는 자리였다. 가부장제에선 어른의 밥상머리 한마디에 절대 순종하던 순박한 시절이기도 했다. 동방예의지국에선 여느 성씨문중이건 관행에 약간의 차이가 날뿐 유림의 주자가례 영향을 받아 예법의 관습이 대동소이하다. 그런 경향 때문일까! 한국인의 예절 관습은 전 세계에서 알아주는 으뜸 국가이기도 하다.
영세하고 힘든 농사일에 수확은 적고, 양식이 태부족이던 그 옛날 그때 「밥을 흘리면 꾸중이 심했다.」 <국이나 면을 먹을 때 후루룩 소리를 내지 말거라, 씹으면서 쩝쩝 소리도 내지 말아 라, 반찬을 뒤적거리지 말거라, 입에 들어갔던 음식을 게워내지 말거라, 급히 먹으면 체 한다.> 등 전부가 옳은 말이었다.
음식상에서 나쁜 기억의 <결 예>를 평생 맘에 두었던 찝찝함을 밝힘은 고약한 식습관이여서다. /찌개 냄비에 제 입에 넣었단 음식을 뜨겁거나, 아니면 많이 떴거나 하여, 입에 들어갔던 음식의 반은 삼키고 반 수 가락은 도로 냄비에 게워냈다가 다시 먹는 상식이하의 버릇을 들춤이다./나의 이 지적에 무릎을 치고 찬동할 독자가 분명 있을 것 같다. 그건 식탐이거나, 맛좋은 음식에 침을 뱉어서 혼자 독식할 심보거나, 무의식적으로 그런 불량한 행동을 했다면 분명 욕심 많고 속이 검은자일 게다. 다행하게도 코로나 19역병 후 식당에선 요식업규정상 덜어먹기가 일상화 되었다. 그럼에도 탕을 각자 따로 먹을 적에 입에 들어갔던 음식 반 수저를 탕에 도로 게워냈다가 먹는 역겨운 짓을 간혹 볼 수가 있다. 스스로 알아서 고쳐야 할 인격문제기에 간섭하기가 어렵다.
“중국인과 모기가 깊은 물에 빠졌다면 중중국인은 두고 모기를 건져 살리겠다.”는 글을 읽었는데 나도 그러지 싶다. 불결하기론 입에 담기조차 싫은 중국여행에서 밥을 먹을 적에 회전식탁에 큰 도자기그릇과 접시에 음식을 내오곤 작은 접시에 각자 덜어서먹는 식문화食文化를 좋게 보았다. <아! 이거다> 하곤 귀국 후 단양방곡도요에 분청사기그릇을 주문했다. 막역지간장인匠人방곡이 쓰임새 있는 그릇을 징만 해 주어 본대로 따라 한지가 40년이 넘었다. 위생상태가 엉망인 중국인들이 악성 돌림병을 견디어 14억 인구를 지탱함은! 덜어먹기 식생활이 한몫했을 거란 추측이다. /센 불에 요리, 주식인 돈육에 허브향료를 넣어 기름에 튀긴 화식火食을 각자 덜어먹어서 ‘침이 섞이지 않아’역병을 용케 피했을 것 같다./
고구려는 우리역사상 가장 위대한 고대국가였다. 우리는 고구려의 기상을 부러워하며 주몽이 이룩한 대 제국으로써 고구려를 기억한다. 고구려 건국설화에 유화부인은 수신水神 화백의 딸로서, 아우들과 놀고 있을 때 천제의 아들 해모수가 웅신 산 아래 압록강가의 집으로 꾀어 들여 사통하고 간 뒤 돌아오지 않음으로 부모가 중매 없이 혼인한 것을 꾸짖어 태백산 남쪽 우발수로 귀양을 보냈다. 여기서 동부여의 금 와 왕을 만난다. 금 와는 유화를 이상이 여겨 방에 가두었다. 감금된 유화의 몸으로 햇빛이 비춰와 몸을 피해도 계속 쫓아와 비추더니 태기가 있어서 알 하나를 낳았다. 알에서 나온 그 성스러운 대왕 시조신의 어머니 유화부인을 신묘에 모시고 곡물은 여성을 상징하므로 「곡물의 여신」으로 추앙했다. 아들의 망명 직전에 오곡종자를 챙겨주었다는 설화로 보아 생활을 풍요롭게 하는 수확의 여신으로 자리 잡았던 그 땐 농경을 가장 중시 하였다. 인류는 수렵채취기를 거쳐 겨우 나라의 형태를 이룬 건국초기의 백성은 하루 한 끼를 먹기도 어려웠다. 삼시세끼를 먹는지가 그리 오래지 않다. 어릴 적에 나도 가을 거지 한 논밭에서 이삭줍기를 하면서 컸다. 그래서 밥상머리에서 밥풀 한 알이라도 흘려선 안 되는 연유인 관습 관행이 벼이삭하나 밥 띠기 한 알에서 비롯되었다면. ‘진지잡수셨습니까?’란 아침인사는 어른들이끼니는 챙겨 드시어 배는 골치 않았을까! 염려스런 오직 우리만의 식습관에 따른 예절로써 신세대가 하등 부끄러워 할 까닭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