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 동포의 생활상 - 임부륙
작성일: 2025-03-12
조선인은 일본에 가서도 조선에서의 생활이나 전통을 가능한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익숙지 않은 일본식 습관이 아니라, 고향에서의 생활양식을 자연스레 하게 되었다. 특히 여성들은 한복을 즐겨 입었다. 음식 또한 마찬가지로 만들었다.
일본인은 조선인에게 집을 빌려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집도 자력으로 짓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사회의 차별과 편견으로부터 서로를 지키고 돕기 위해 점점 한 곳으로 모여들어 집단거주지 이른바 조선부락 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수도, 하수, 전기 등의 설비가 없어 불편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화장실도 지역 전체에 한두 곳 밖에 없어 위생적인 면에서도 문제가 되었다.
하지만 그 곳에서 고추를 비롯한 조선음식의 식재, 한복 옷감 조선식당 등이 있었고 일자리의 알선도 받을 수 있었다. 남의 눈을 꺼리지 않고 조선말 로 얘기할 수 있는 집단거주지는 일본에서 유일하게 마음이 편해지는 장소였다고 할 수 있었다. 동향회나 친목회 등도 생겨 노동, 민족운동의 토대가 되기도 했다.
일본의 엄혹한 환경 속에서 조선 농촌에서의 삶의 양식을 계승한 민족적 전통을 지키며 생활한 곳이 재일 동포의 집단 거주지의 해방 전의 생활상이었다.
해방 전 일본의 사회운동, 노동운동은 재 일 조선인의 활동 없이는 성립될 수 없었다고 한다. 차별철폐, 생활권 보장을 위한 운동은 재 일 조선인이 10만 명을 넘어선 1920년대 초부터 고조되었다. 이때 메이데이의 기수는 조선인 들었는데 이들은 항상 일본운동의 전위로서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권력을 악으로 보는 무정부주의자들의 존재도 컸었다. 당시운동을 적대시 하는 특별고등경찰 즉 정치경찰의 담당이 ‘주의자계’(사회주의자 담당) ‘센 징 계’ (조선인 담당) 로 나뉘어져 있었던 것도 이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전자의 감시대상은 계급문제에서 비롯되는 일본의 사회 노동운동이었고, 후자는 계급문제 뿐만 아니라‘목숨 걸고 우리나라를 돌려 달라’ 고 외치는 민족운동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당국은 독립을 말하는 자를 천황의 영토를 훔치는 ‘불한당’ 이라 칭하였다. 이것은 계급차별과 민족차별(이중차별)을 의미하여 조선인들은 가차 없는 탄압을 받았다.
전시체제로 이행해 가던 30년대 후반, 일본의 사회운동은 거의 괴멸하지만 조선인의 운동은 민족의 독립을 지향하면서 여러 갈래 형태로 계속되어 총동원체제를 구축하려는 일본에게는 약점이 되었다. 해방직후 치안유지법 등으로 투옥된 사람들의 출옥을 환영하고자 ‘마중’나간 사람들은 대부분 조선인이었다.
중일전쟁발발 이후 일본은 국가총동원법, 국민징용령 등을 공표하며 총동원 체재를 확립하였다. ‘내지’의 기간산업을 중심으로 조선의 청년 남자를 대거 동원하여 가혹한 노동을 강요하였다. 이른바 조선인인 강제 연행이다.
1939년 가을부터 시작한 노동동원은 당초 ‘회사의 개별모집이었으나 태평양전쟁 발발 후에는 ’관 알선‘ 으로 강화되었고 전쟁말기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징용‘으로 바뀌었다.
‘노무동원계획’(39∽41년도), ‘국민동원 계획’(42∽45년도) 으로 인하여 총 72만 명 이상이 조선으로부터 일본국, 남사할린, 남양 군도로 연행되었다. 그중 약 반은 탄광, 나머지는 광산, 토목 건축, 공장, 항만 하역 농장으로 보내졌다.
탄광노동은 힘들고 위험 한데다가 밥도 제대로 못 먹는 상황에서 숙소에서 도망치는 자가 속출하였다. 회사는 도망을 막으려고 임금의 대부분을 예금이나 송금이라는 방식을 취해 현금을 직접 지불하지 않았으며, 이에 반항하는 자를 ‘타꼬베야’로 보내는 등 엄격한 노무관리를 행하였다. 해방 후 조선인 노동자들은 죠반탄전, 호쿠탄 유바리 등지에서 연합군최고사령부(GHQ)와 일본정부를 상대로 쟁의를 하였으나 GHQ는 이들을 탄압하였다.
미불임금은 본인에게 통지하지도 않은 채 공탁되었으나 그 후 몰수당했다.
그 외에도 유골방치, 사할린 이산가족 등 지금도 해결되지 은 문제가 많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