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륵 출신지 「생초마을」일 가능성 학계인정
작성일: 2011-10-14
- 국립 충주대 동아시아 연구소 주관으로 우륵의 활동무대인 충주에서 학술대회 -
지난 6일 악성 우륵의 활동무대였던 충북 충주시에서 국립 충주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소장 박영록) 주관으로 국내 기관 및 학술단체 회원들과 장병집 국립 충주대학교 총장, 거창군 의회 안철우․김재권 의원, 거창 언론인․문화예술인․향토사연구원, 거창문화원회원, 가조면주민, 우륵 관계 지자체 등 2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우륵 출신지 규명 학술대회가 개최되어 우륵의 출신지 성열은 거창 가조 생초마을(옛이름 소새마을) 일 가능성이 한층 분명하게 제시되었다.
제1부에서는 박영록 충주대 중국어학과 교수의 ‘우륵 문헌자료의 해석과 나제 공방지 재검토’와 진석용 대전대 정치학과 교수가 ‘7세기 중엽 나제의 군사적 공방과 7성의 위치’에 대한 발표를 하였다. 제2부에서는 동아시아연구소 임병권 연구원 등이 ‘우륵 출신지 성열 지명 고증의 문제들 정리’에 대해 발표 및 토론이 이어졌다.
이번 학술대회에서 “우륵의 출신지는 삼국사기 악지에 「성열현」으로, 김유신 열전에 664년에 상장군 김유신이 「성열성」 등 백제의 7개성을 함락했다는 기록 때문에 두 지명에 모두 등장하는 「성열(省熱)」이 우륵의 출신지라고 전제하고, 백제 위덕왕부터 의자왕 초기 나제전쟁의 공략지역과 행정구역을 연구한 결과 백제는 낙동강 동안까지 진격하지 못했을 것이며, 김유신군은 의령까지 가지 않았을 것이다”고 하였다. 따라서 “7성의 위치를 고령 우곡에서 거창에 이르는 인접지역으로 추정”하였다.
군사학적으로 볼 때 김유신이 공취한 7개성은 서로 인접하여 있어야 하며 현재 흔히 추정하는 것처럼 구미 인의동, 고령 우곡, 의령 신반 혹은 대구 불로동과 같이 여기 저기 산재해 있을 수는 없다고 전제한다. 그리고 김유신의 공격 경로를 6개 루트로 나누어 가능성을 살펴보았는데, 그 중에서도 강력한 군사 거점이 있는 대야성을 피해 낙동강 상류에서 남하하여 육십령․팔량치→함양→거창→고령으로 진입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성열성 등 7성이 고령군 우곡면의 서쪽 일대의 지역이 되는 것이 적절하다고 하였다.
반면 의령에 성열성이 있었다는 가설은 신라군이 백제군의 진영을 앞에 두고 대규모 도하 작전을 해야 하며, 향후 공격 목표인 합천이 멀다는 점 등을 볼 때 가능성이 비교적 떨어진다.
언어학적으로는 ‘성열’의 경우 관련 자료가 비교적 적은 사례여서 훈독과 음독의 해석 가능성이 여러 가지로 존재하므로 어떤 이론이나 가능성이 있지만, 논리적 완결성을 볼 때 거창의 ‘성열>소새’설이 의령의 성열>신이(新尒)설 보다는 논리적으로 앞서는 점이 밝혀졌다.
의령설은 일본의 역사학자가 제시하였으며, 여기에 언어학적 근거를 뒷받침하려는 것이 김승곤 교수의 주장인데, 가장 큰 취약점은 ‘신이(의령)가 곧 성열이므로 성열과 신이는 같은 말이다’라는 일종의 자기순환논리의 모습을 띠어 언어학적 분석으로서는 합리성이 부족하다.
이에 반해 거창 가조설은 ‘省熱’이 삼국사기에서 ‘소사리’와 유사한 음을 표기했을 것이고 그것이 가조면 생초(省草)마을의 전래 지명 ‘소새’의 어원으로 인정될 수 있기 때문에 논리의 연결고리가 더 강하다 할 수 있다.
우륵 출생지에 관해 의령, 고령 등 몇몇 지자체에서 우륵 출생지를 주장하고 있지만 학술적으로 확정되지는 못하고 있으며, 자치단체의 사업목적과 방향에 출생지의 근거를 맞추는 접근방법을 펼쳐왔다.
이에 거창군에서는 과거의 연구결과에 나타난 문제점들을 보완하기 위해 언어학뿐만 아니라 군사학․지리학 등 종합적인 학술적 연구를 하고자 국립 충주대 동아시아연구소와 함께 학술용역사업을 진행하게 되었다.
거창군에서는 이번 학술대회를 통해 고증이 완벽한 군사학적 접근 등의 다양하고 명확한 역사문화적 견해를 제시하여 객관적 사실을 후손들에게 인식하도록 남겨주고, 거창군민들의 공감대 속에서 고령, 충주와는 다른 우륵 출신지 기념사업을 추진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