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총장도 권총 뺏긴 채 꿇어앉아 있었다"

작성일: 2004-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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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입수-나는 반민특위 조사관이었다 5] 특위해산 전말

친일청산 문제를 놓고 여야가 정면대치 하고 있는 가운데 1948년 제헌국회 당시 반민특위에서 조사관으로 활동한 정철용(79)씨의 '회고록'을 단독입수, 몇 차례에 걸쳐 소개할 예정입니다.
정씨의 회고록에는 반민특위에 몸담게 된 계기, 친일문인 이광수 등 반민 피의자 체포 경위, 현 정치권에 보내는 고언 등이 담겨 있습니다. 반민특위 관계자들이 거의 작고한 상황에서 정씨의 '기억들'은 귀중한 사료가 될 것입니다.


1949년 6월 6일.
반민특위에서 일하던 요원들은 이 날 발생한 사건을 흔히 '6.6 사건'이라고 부른다. 반민족 행위자의 단죄를 갈망하던 국민 모두의 치욕의 날이기도 했다.
반면, 반민족 행위자, 특위의 활동을 반대하고 비난하던 자, 애국인사를 체포하고 고문한 악질 경찰관, 그리고 반민법에 의해 체포되어 조사 중인 피의자들에게는 '해방의 날'이었다. 또한 정권유지를 위해 친일경찰을 옹호한 독재 정권에게는 '승리의 날'이기도 했다.
제헌국회에서 제정한 반민법에 의해 발족한 반민특위는 활동을 개시한 지 불과 반 년만에 와해되었다. 국법을 수호해야 할 국가 경찰에 의해 백주에 서울 한 복판에서 당한 것이다. 그것도 수도 서울의 중심 치안기관인 서울 중부경찰서장이 진두지휘하는 총칼에 의해 감행된 불법 테러행위였다. 게다가 그 배후가 대통령이라고 하니 더욱 놀라울 따름이다.
나는 당시 반민특위 조사관으로서 이 사건의 목격자로서 당시의 상황을 사실 그대로, 가감없이 기록으로 남김으로써 민족정기를 고취시키고 우리 민족의 역사를 바로 세워 후손에게 남기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반민특위에서 활동했던 조사위원(당시 국회의원 중에서 선발함), 특별검찰관, 특별재판관 그리고 조사관 가운데 대부분은 고령으로 세상을 뜨고 생존자가 거의 없다. 결국 생존자인 나에게 당시 상황을 증언할 기회가 주어졌는데 이것이 행운인지 불행인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나는 1949년 6월 6일 반민특위가 경찰에 의해 습격 당하던 그 날의 상황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내가 직접 겪은 일이다. 당시 특위에서는 매주 월요일 조회를 실시하고 위원장의 말씀, 그리고 각 부별 회의를 마친 후 그날의 활동을 시작했다.
나는 평소와 같이 오전 9시 특경대원 2명과 함께 출근했다. 그런데 그날따라 어쩐지 느낌이 이상했다. 특위 정문 경비경찰의 복장이 다르고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정문에 들어서니 무뚝뚝한 표정으로 인사도 안한다.
나는 농담조로, 조금도 악의없이 “아침도 못 먹고 왔어. 왜 그리 기운들이 없이 잔뜩 부어 있어?”라고 말을 붙였다. 그러나 아무 대답도 않은채 그는 정문을 열었다. 특경대원이 먼저 들어가고 나는 뒤따라 들어섰다. 그 순간 5명의 무장경찰관이 우리를 에워싸고 그 중 3명은 특경대원의 손을 비틀어 뒤로 제치고 한 명은 권총과 신분증을 빼앗고 사무실 후문 쪽으로 끌고갔다. 대항하거나 말할 틈도 없었다.
다음은 내 차례였다. 남은 경찰 한 명은 나에게 다가와서 손을 들고 머리 위에 얹으라고 한 후 총부리를 옆구리에 대고는 신분증과 권총을 순순히 내놓으라고 했다.
나는 큰 소리로 “건방지게 누구에게다 손을 대! 비키지 못해? 누구의 명령이얏?”하고 그 경찰의 뺨을 두 번 후려갈겼다.
대답은 간단했다. 총대로 나의 허리를 마구 때리고 발로 찼다. 나는 대항할 힘도 없이 그 자리에 엎어졌다. 다른 경찰이 합세하여 나를 발로 찼다. 결국 나는 그들에게 신분증과 권총을 빼앗고 사무실 뒷편에 있는 마당으로 끌려갔다.
끌려가서 보니 나보다 먼저 출근한 특위, 특검, 특재의 요원들, 그리고 낯이 익은 국회의원 등 여러 명이 모두 머리에 손을 얹고 땅바닥에 꿇어 앉아 있었다. 대체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그렇게 당한 것이다.
심지어 우리나라 검찰의 총수인 권승렬 검찰총장(당시 반민 특별검찰관장 겸임)도 꿇어 앉아 있었다. 이게 모두 사실이지만 그간 세상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창피하기도 했지만 그들의 체면상 쉬쉬했기 때문이다. 모두 권총도 압수당한 상태였다.
우리 주위에는 기관단총, 소총 등으로 무장한 경찰들이 포위하고 있고, 2층(검찰부 재판부가 있었음)으로 가는 계단에도 무장경찰들이 지키고 있었다. 약 2시간이 지난 뒤인 오전 11시경, 경찰들은 특경대원들만 어디론가 끌고 가고 그들 또한 한 사람도 없이 사라졌다. 아마도 모두 철수한 모양이다. 우리는 누구의 지시도 없이 사무실로 돌아와서 맥없이 앉아 시간만 보냈다. 우리의 신분증은 한 군데 모아두고 철수한 듯 했다.
오후 1시경, 김상돈 부위원장과 몇 명의 조사위원들이 왔다. 지금 국회에서 불법을 따지고 있으며, 곧 원상회복이 될테니 안심하고 정상적인 근무를 시작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손에 안 잡힌다. 이날 국회에서는 내각 총사퇴 결의안이 가결되고, 대통령의 하야까지 거론되었다. 그러나 한번 쏟아진 물은 다시 주워담기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로인해 특위 활동은 무기력해졌고, 요원들도 일할 의욕을 상실하게 되었다. 끌려간 특경대원들은 각 경찰서(당시 서울에는 8개 경찰서가 있었음)에서 돌아가며 구타하고 발로 차여서 전치 1개월이 넘는 부상자도 있었다. 이들의 신변 안전을 위하여 국회의 주선으로 특경대원 전원을 서대문 적십자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하였다.
또한 특위 위원 중에는 공산당 앞잡이가 있다는 등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요원들은 항상 미행을 당하니 조심하라는 협박까지도 하였다. 그 뿐이 아니었다. 특위의 강력한 후원자이고 특위 업무에 참여하였던 국회의원들이 공산당 프락치사건에 연루돼 체포되었다. 우리는 출근은 했으나 일이 손에 안 잡히고 의욕도 상실된 상태에서 잔무 정리나 하고 있었다. 각종 서류도 풍비박산이 돼 찢어지고 분실되었다.
6. 6사건이 터진지 한 달 뒤인 1949년 7월 6일 국회에서는 특위의 공소시효 단축 결의안이 가결되었다.(당초 1950월 6일 20일까지였던 공소시효를 1949일 8일 31일로 단축시켰다.) 그로인해 특위는 사실상 해체된 셈이다. 이에 항의표시로 김상덕 위원장을 비롯한 모든 조사위원들이 사퇴하였다. 1949년 7월 14일에는 이인 전 법무부장관이 새 위원장으로 취임했다. 잔무 정리(청소)하러 온 것이다.
이런 와중에 반민특위의 정신적 지주였던 김구 선생이 6월 29일 백주에 안두희에게 암살당했다. 1949년 9월 반민특위는 민족정기의 꽃도 피우지 못하고 열매도 거두지 못한 채 '일시 중단'됐다.
특위 업무가 완료되면 특위 요원들은 현 직급대로 정식 임용하겠다던 정부의 약속은 휴지조각이 되었다. 대부분 갈 곳이 없는 실업자 신세가 되었다. 민족정기를 살리고자 반민특위에서 열심히 일한 대가가 겨우 매맞고 실직자가 된 것이다.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60년이 흐른 지금도 무거운 것을 들 때나 오래 보행을 하면 그 때 경찰들에게 총대로 얻어맞은 허리가 아직도 쑤시고 아프다. 그럴 때마다 '6. 6 사건'이 아스라히 생각나곤 한다.
나는 반민특위 업무가 종료된 것이 아니고, 일시 중단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정당한 법적 절차 없이 경찰의 총칼로 그 기능을 마비시키고 항거할 힘도 없는 상태에서 시효를 단축시켰기 때문이다. 아직도 특위의 시효는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비록 민족정기의 잎과 가지는 모진 비바람에 꺾이고 찢겨 그 형태는 볼 수 없다. 그러나 그 뿌리는 온 국민의 따스한 체온과 대자연의 영양을 공급받아 오랜 기간(56년)의 겨울잠에서 깨어나 다시 새싹을 피우려고 굳은 땅을 헤치고 솟아오르고 있다.
잘못된 역사는 이제라도 바로 세워야 한다. 잘못 끼운 첫 단추는 다시 끼워야 다음도 올바르게 이어진다. 이것이 후손에게 물려줄 소중한 민족유산이다.

자료제공 (사)민족문화발전연구소 한알



▲ 1949년 5월 8일 대전부청(시청)에서 '민족정기단 충청남도 발단식'을 마친 후

기념촬영한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