林扶陸의 만나고 싶다 그 사람 8
작성일: 2015-07-22
대한민국 6 . 25 참전유공자회 경남거창군지회장 정기환 전쟁영웅回顧談(회고담)
【1950년 3월부터 북한의 인민군이 곧 남침할 것이라는 정보를 좌익분자들 입을 통해 입수한 정보가 국민들 사이에 공공연하게 회자되어 공포분위기가 조성되었으나 이승만 정권서는 유언비어라 일축을 했다. 육군본부 정보국에서도 북한의 인민군 남침이 임박했다고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에게 보고를 했으나 “북한은 남한을 침략할 자원과 능력이 없다고 일축했다. 그리고 같은 민족끼리 전쟁을 설마 하겠는가?” 라고 사그리 무시를 했다. 그 당시 여러 정황을 미루어 볼 때 북한인민군의 남침은 기정사실이었다. 이범석 초대국방장관은 “북한 인민군은 반드시 남침할 것”이라고 하면서 진지를 구축하고 호국군(예비군)4만여명을 양성하였는데,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과 사회를 불안케 하는 장관이라고 해임시키곤 신성모를 국방장관으로 임명케 하였다. 고로 후임 신성모 국방장관은 예비군을 해체 시켜 인민군이 남침했을 때 후방을 지킬 국군 예비 병력이 없어 낙동강까지 순식간에 후퇴하게 된 결과를 빚었다.
“국군은 인민군을 막을 수 있었음” 에도 이승만 정권의 무능으로 인해 同族相殘의 韓國戰爭史에 치욕을 남겼다.
저의 종형 林二鍾은 육사7기생 소대장으로 6월 24일 결혼 초야에 전쟁이 발발 귀대 후 국군 6사단 19연대 대대장으로 복무 1.4후퇴 당시 중공군 2개 사단과 괴뢰군 1개 사단에 완전 포위되어 대대장으로써 부대가 전멸하는 불운을 안고 산화하셨다.
또 백두산 상봉에 태극기를 꽃고 압록강 정화수를 수통에 담는 장면이 대한 뉴스에서 극장마다 상영 그 영상이 북상면 월성에 거주한 고 장병호 예비군역 하사입니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면 미칠 것만 같아서 독주(毒酒)에 의존해 살다가 유명을 달리한 전우가 어찌 그 분뿐이겠습니까?
만시지탄이지만 6.25참전유공자회 경남거창군지회장 정기환(鄭琪煥)전쟁영웅은 대한민국 근정표창, 국민포장, 대통령 표창, 대한민국재향군인회 공로휘장 · 휘장표창 외 다수의 공로상을 수상하셨다. 同 신천팔 사무국장은 공군 주임상사로 재직시 공군 제1전투비행단 통신대대, 공군 30방공관제대대, 공군제주도 관제대대, 공군용문산 관제대대(최전방 레이더기지)창설 등 한국공군의 산 증인으로 혁혁한 공을 세우셨다】
-거창시사뉴스사장 임부륙
Q 회장님 死線을 넘나드는 戰場에서 생존 하시어행복한 삶을 영위하시니 신의 신의가호라 믿으면서. 무공 담을 듣고 싶습니다.
A. 6.〮25 참전 영웅 북상면 정상대 회원에 의하면, 같은 날 3트럭의 인원이 입대했는데, 휴전 후 한 트럭 정도만 생존귀향 했다고 합니다. 고 하경세 소대장의 증언에 따르면 마산동중학교 1학년 때 길거리에서 붙잡혀 학도병으로 전시징집 되어 서부전선 장단 고랑포 지구 전투에 투입되어 치열한 전장에서 임무수행중소대장이 전사하면 특무상사가, 또 그 소대장이 전사하니까 일등중사가 소대장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그 소대장마저 전사하니까, 당시하사인 본인이 소대장으로 현지임관 얼떨결에 소대장이 되었다는 슬픈 추억을 회상하며 탁주 사발을 기우리며 눈에 눈물이 비치기도 했다.
“중대장님 지금 인민군이 새까맣게 올라옵니다. 소대장의 보고를 받는 순간 비 오듯 퍼붓는 포단에 전화선이 끊어졌습니다. 무선전화기로 중대장은 연대장에게 보고 ”중대장 잘 들어라 이건 명령이다. 고랑포는 수도 서울 까지 직선거리로 제일 근거리에 있는 요새지이니까 진지를 사수하라“하시곤 전화가 끊어졌습니다.
최후의 보루 치열한 낙동강 전투에서 아군이 밀리어UN군 사령관 워커 중장이 대구를 버리고 후퇴하겠다고 대통령에게 보고하자 이승만 대통령과 조 조병옥 내무장관이 결사반대 사수할 것을 종용하자 권총을 겨누었다. 두 분은 양 가슴을 들이대곤 우릴 죽이고 가라고 한. 그 결과 낙동강전선을 사수해 대구를 지켜 내었습니다. 대구엔 전시 육해공군 사령부가 있었고, UN군 해군사령부는 부산앞바다에 정박한 선상이었습니다. 그 전사에 길이 남을 왜관 다부동 전투에선 인민 군 3개 사단이 전멸하다시피 해 어렵사리 대구를 방어하게 되었습니다. 여기 포항 영일전투에서 부상 기적적으로 생환한 주상면 신용범(86)예비역병장 또한 전신에서 수류탄 파편을 맞아 죽을 고비를 넘겨 눈을 뜨니 야전병원이더란 말만하곤 시체 더미에 나는 썩는 냄새며, 식수가 없어 목이 타는 지긋지긋한 그때의 상황을 입에 담기조차 싫다고 고개를 저었습니다.
Q. 국장님 게서도 무공수훈 담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A. 저는 공군에서 근무했는데 그 당시는 건국초기라서 공군시설이나 장비가 열악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공군은 레이더 기지가 최전방인 셈인데 대구, 제주도, 용문산 관제기지건설에 주임상사로써 일익을 담당한 공군의 산 증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공군참모총장 김성룡 대장이 위문품을 전달하는 사진입니다. 그것은 최전방레이더기지가 공군의 눈의 역할이라 얼마나 중요한가를 간접적으로 증명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반경 2200㏎ 관제소는 지하 벙커라서 전자빔에 노출 장애가 발생할 수 있는 열악한 근무조건입니다. 미군은 6개월마다 임무교대인데, 한국군은 인원부족으로 계속 근무하는 상황이라 불임 또는 장애아를 낳는 최악의 조건에서 19년간 복무했습니다.
Q. 종전 아니, 휴전 65주년입니다. 회장님! 꿈같은 얘긴데 우리 평생에 통일 을 기대해도 되는 것입니까?
A. 북한의 재침은 물론 남한 적화 통일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황장엽은 북한의 국회의장을 11년이나 했습니다. 김정일이 전쟁을 일으키려는 것을 보곤 남북전쟁이 재발할 시는 모두 파별된다고 판단 전쟁을 막으려고 1997년 월남했습니다. 허나 남한의 햇볕정책과 경제지원을 해 김정일을 살려주는 것을 보곤 “어찌 이럴 수가 있을까” 통곡의 눈물을 흘리다가 죽었습니다. 더하여 주변국이 한국 통일을 원치 않아 정세(政勢)가 어떻게 돌변할지는 모르겠으나 저로선 안타깝지만 요원하다는 생각입니다.
- 대담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r2005@daum.net